국외

[스크랩] 대동-북경 500km 자전거 사진여행(5) - 운강석굴

맑은 계곡 2006. 7. 17. 15:33



제3굴. 낙양 천도시기에 파여진 굴이다. 굴의 크기로는 운강 최대의 굴이다. 삼존불은 당나라시대때 조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둥굴고 풍만한 모습이다.



운강석굴



5월의 첫날이다. 어제만큼이나 날이 청명하다. 어제처럼 날이 뜨거우면 오늘 오후의 자전거 여행도 꽤나 뜨거울 것 같다.

아침식사는 호텔에서 나와 역쪽으로 가다가 길가의 콰이찬팅에서 국수와 차에 삶은 계란으로 간단히 했다. 콰이찬팅은 영어로 하면 패스트푸드점이다. 국수나 만두 혹은 볶음밥 등 중국식의 식사를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곳으로서 식당의 테이블, 메뉴, 카운터 등 객실 설비와 운용은 서양의 맥도날드 등의 점포 운영방법을 빌려와 중국화 했다.

최근 중국의 어느 역 근처에 가도 이런 현대식의 콰이찬팅이 많이 생겼다. 맛은 뭐 그렇다하더라도 일단 저렴하고 또 비교적 위생적인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메뉴도 사진으로 되어 있어 중국어를 몰라도 주문하기에 유리하다. 손가락으로 먹을만하다고 생각되는 요리를 가르키기만 하면 된다. 겉보기처럼 맛도 그럴듯하기를 기대하며..... 이 소박한 기대는 거의 역시나(!)로 끝나기는 하다. 그러나 중국의 발전은 이처럼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에서도 실로 눈이 부시다.

운강석굴로 간다. 역전에서 4번 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10번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 그런데 이 4번 버스가 완전히 동네 한 바퀴다. 시내의 가장 번화한 노선만을 골라서 한 바퀴 돈다. 덕분에 대동시의 활기차게 현대화된 변화의 모습을 보는 것은 좋은데 좁은 길에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때문에 아까운 아침 시간만 속절없이 길에서 보낸다. 역시 여행에서 돈과 시간은 반비례한다. 결국 10번 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를 잡아서는 20원으로 흥정을 한 다음 석굴로 향했다. 같이 온 일행이 오후에는 북경으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으므로 시간이 별로 없다. 여행에서 편리함과 시간이 부족하면 돈을 들여서 살 수 밖에 없다.



운강석굴은 대동시의 서남쪽 15km 떨어진 무주산의 남쪽 사암절벽에 조성되어 있다. 좌우 1.6km의 절벽사이에 작은 협곡이 두 개가 있어 전체적으로 세부분의 절벽으로 나누어진다. 입구엔 커다란 조감도가 있다. 우측부터 동굴의 번호가 붙어 있는데 번호는 그냥 우에서 좌로 순서대로 붙여진 것이다. 크고작은 수 없이 많은 동굴이 있지만 관람의 가치가 있는 굴들에 번호를 붙여 놓은 것이다.

맨 우측의 1번 동굴부터 차례로 왼쪽으로 이동하며 구경하기로 한다.

각 굴의 앞에는 간단하게 굴의 조성연대와 내용을 중문과 영문으로 소개한 팻말이 세워져 있다. 석굴에 조각된 의미와 내용 설명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불교에 문외한 사람들에게는 그나마도 감지덕지다.



운강석굴 정문 입구에 있는 사자상. 화려한 장식의 높다란 대좌 위에 상대적으로 야윈 몸과 커다랗고 뭉툭한 코를 가진 큰 얼굴을 삐딱하게 한 해학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목에 단 방울과 영락장식은 아주 소박하다. 언제 시대의 작품인지 전혀 설명도 없고 보호 철책도 아예 없는 것을 보아서는 그리 중요한 가치는 없는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래도 얼치기 나그네의 눈에는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석굴은 북위시대에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진시황에 의해 통일된 중국은 곧 한에 의해 멸망하고 한 역시 후한 대에 그 힘을 잃어 위, 오, 촉의 삼국으로 분열된다. 조조의 위에 의해 잠시 통일이 되었지만 곧바로 사마씨의 진나라에게 그 권력을 넘겨야 했다.

호시 탐탐 중원을 노리고 있던 북부의 유목민족들에게는 이런 중원의 혼란은 기회였다. 기회는 이용하는 사람에게만 그 결실을 가져다주는 법. 호족들은 바로 말위에 올라 중원을 쳐들어가고 이를 견딜 수 없었던 중원의 한족들은 남쪽으로 쫓겨 가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급급하게 된다. 수양제가 다시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화북과 화남이 분열된 시대, 이른바 중국의 남북조시대(420~589)의 시작이다.

이때 화북을 쳐들어 왔던 유목민족은 다섯 민족으로 이들은 점령한 화북의 넓은 땅에 서로 깃발을 꽂아 국가를 세우고 세력다툼을 하기 시작한다. 북조는 이 다섯 개의 오랑캐가 세운 16개 국가의 시대라고 하여 5胡16國 시대라 부른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이민족이 한족을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16개국은 그 이전 그리고 이후의 중국의 역사가 항상 그렇듯이 분열의 시대 다음의 통합의 시대로 넘어가 점차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한다. 그 최후의 패권을 잡은 나라는 선비족 탁발씨가 세운 북위이다.

몽골족의 원류로 생각되는 이 덜 문명화된 침입자들은 토착민족인 한족을 호화(胡化)시키는 대신 재빨리 한족의 귀족문화를 받아들이고 초원을 버리고 대동과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한족과의 결혼정책을 통해 중국식 국가를 건설한다. 이들은 또 자신들의 국가를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적인 사상을 적극 모색하고 받아들이는데 바로 불교다.









제5굴과 6굴 전면의 목조건축물. 보와 기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귀면장식이 현공사에서 본 그 양식이다. 이 목조 건축물은 모든 굴의 앞에 세워져 있었지만 세월의 역사에 모두 스러지고 지금은 제5~8굴의 입구에만 있다. 특히 5~6굴의 목조 건축물은 청나라때(1681년) 건축된 것이다.5굴과 6굴의 귀면 모습이 형태나 색상에서 조금씩 다르고 또 층간마다도 조금씩 다른 것을 보면 무언가 의미가 있는 듯 하나 알 수가 없다.



운강석굴은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에는 거의 조성이 되어지지 않고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러다가 요나라때와 청나라때 대대적인 보수작업이 이루어졌다. 제5굴의 앞에 서있는 청나라때 보수한 기록이 남아 있는 탑의 이수. 투조로 조각한 용의 장식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제5굴과 6굴은 쌍굴(473년~493년,제2기 조성)이다. 제5굴에 있는 석가모니불은 운강석굴 최대의 불상인데(17미터), 운강석굴들 조성 당시 불상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 전면에 있는 목조 건축물로 보존상태가 좋다.



제6굴은 중앙에 커다란 탑이 조성되었다. 탑신과 사면 벽, 그리고 천장에 이르기까지의 화려한 조각과 색 장식은 처음 보는 나그네에게는 숨이 턱 막힐 정도이다. 탑신 주위의 사면 벽에는 부처가 태어나서 성불하기까지의 과정이 33장의 벽 부조로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오른쪽 어깨를 탑신쪽으로 하고 시계방향으로 돌아야 한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관계로 몰래 찍었다. 그나마 플래시를 터뜨릴 수 없어 겨우 건진 한 장 사진이다.



삼황오제의 신화시대를 거쳐 하, 상, 주를 거쳐 위대한 사상가의 시대인 전국시대에 이르러 중국민족의 사유는 기본적인 완성을 이룬다. 이때 수많은 제자백가 중에서 단연 백미는 군자의 도라고 일컬어지는 유교이다. 진나라 이후의 모든 중국의 역대 황조는 이 유교를 사회질서의 근본으로 삼았다. 사회의 지도이념으로서 유교는 공자의 君君臣臣父父子子-군주는 군주답게 다스리고, 신하는 신하답게 섬기고, 아비는 아비답게 행동하고, 아들은 아들답게 행동해야 한다.-로 간략히 설명된다. 상하의 질서와 복종의 개념은 국가유교로까지 발전되어 받아들여진다. 중국의 어느 역대 왕조도 이 유교적 상하우열의 계층을 강조하고 예와 덕으로 표현되는 군자의 도덕적 가치이념을 최고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유교는 지배층의 통치이념이었고 실제 국가의 일반 백성에 대한 지배 이념은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질서의 수단으로 삼는 상앙, 한비자, 이사의 법가였다. 진시황이 법가사상을 적극 받아들여 천하를 통일한 후로 중국의 어느 역대 황조도 이 두 가지 유교와 법가의 법치주의를 포기한 적이 없다.

진과 한나라의 국가유교에 의한 최초의 통일의 시대는 곧 그 내부의 모순으로 붕괴되었다. 전쟁은 계속되고 일반 백성은 전쟁과 부역으로 고통을 받았다. 공자에 조금 앞서 태어난 노자는 이런 고통받는 일반 백성에게 무위라는 일종의 사상적 피난처를 제공한 것으로 추앙받았다. 도교는 유교적 규범에 가장 강하게 반기를 든 학파였다.

중국의 토착 종교인 도교와 외래 종교인 불교가 아무리 번성했다 하더라도, 통치라는 단계로 관리역량을 조직화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유교적 교육을 받은 국가의 관리는 항상 사찰과 도관의 토지와 재산, 승려와 도사들을 등록하여 통제하고 관리하려고 힘썼다.

자신들의 수보다 훨씬 많은 선진화된 민족을 다스리기 위한 선비족 지배층은 자신들의 문화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이기에 힘썼다. 유교와 도교는 둘 다 그들의 새로운 지배이념에 맞지 않았다. 결국 그 대안은 당시 점차 중국 사회에서 그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던 불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4세기 이후 화북에 들어온 이민족 침입자들이 불교를 수용한 것은 대체로 불교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대신한 구질서의 외부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불교 승려들은 대중에게 순종의 미덕을 기르게 하는 동맹자가 되었다.

현생의 고달픈 삶이 황제나 제국의 끊임없는 확장의 핍박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생의 업(카르마)에 연기되어 나타난 결과이며, 그리고 현생에서 자비를 실천행으로, 내세의 열반을 추구하는 구도 방법은 새로운 이민족 지배층에게는 아주 적절한 것이었다. 그들은 곧 불교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으며, 이에 편승하여 불교를 전파하려는 승려들은 이 지배층과 결탁하여 그들의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그 결과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대대적인 불사(佛事)로 나타나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이 탄생하게 되었다.





제7굴에서 왼쪽으로 본 운강석굴. 사진에서 목조 건축물이 있는 굴이 제8굴이다. 제7굴과 8굴도 쌍굴 형식이다.



제7굴의 후실입구 오른쪽 문틀에 조각되어 있는 시바상. 웃는 모습과 오른쪽 다리를 살짝 든 자세가 섹시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신이 가지고 있는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도 같이 가지고 있다.



제8굴 후실입구 오른쪽 문틀의 시바상. 여러개의 머리와 손을 가지고 있고 손에는 각각 해와 달 그리고 활 등 무기를 들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파괴의 신이자 수행자를 보호하는 수호신이기도 하다. 소를 타고 있다.



제8굴 후실입구 오른쪽 문틀의 비슈누상. 시바상과 비슷하게 여러개의 머리와 팔을 가지고 있다. 힌두교에서는 태양신이자 창조의 신이다. 공작새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위 사진들의 비슈누(鳩摩羅天,Kumarakadeva)와 시바(摩醯首羅天,Mahesvara)는 고대 인도의 힌두교에서 각각 창조와 파괴의 신들이다. 불교는 고대 인도의 사상에 그 원류를 두고 있으므로 이들 힌두교의 신들은 불교에 흡수되어 절대신의 위치에서 불교의 호법신으로 격하되었다. 중국에 있는 석굴에서 이들의 조각상을 본다는 것은 초기에 중국에 불교가 건너올 때 지금과는 많이 다른 형태임을 짐작케 한다.



제9굴의 입구. 제9굴과 제10굴, 그리고 제11굴과 제12굴(470~493)도 쌍굴이다. 이 굴들은 대단히 비슷하다. 제11굴~12굴은 입장할 수가 없다.



9굴과 10굴의 전실 앞면은 여러개의 기둥으로 조성되었다.전면의 기둥들은 최근에 보수하여 쌓아 놓은 것이다. 전실의 후면 벽 조각은 대단히 화려하고 특히 중단부의 조각은 불법의 세계인 수미산을 묘사한 것이다. 좌우 양측에는 비슈누와 시바신이 해와 달을 들고 있고 보살들과 동물들이 많이 있다. 현세와 내세는 두마리의 뱀으로 구분이 되는 것 같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설명판에는 용으로 되어 있다. 불교 관련 서적중에서 두마리의 꼬여있는 뱀으로 구분되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동물중에서 특히 뱀은 불교에서 용과 구분이 잘 되지 않는데, 고대 인도에서는 서양과 달리 뱀은 그렇게 사악한 존재로는 생각되지 않는 것 같다. 중국의 건국신화중에 나오는 여와와 복희씨의 하반신도 뱀으로 묘사되어 있으므로 인도와 고대 중국의 신화에 나오는 두 마리의 뱀은 상당한 연관성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제12굴 벽과 천장이 맞닿는 최상층부에 조각되어 있는 기악대. 고대 악기와 연주 형태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한다. 남미의 팬풀릇과 비슷한 악기가 특히 눈에 뜨인다.



제11굴 전실 벽과 전실 앞의 구조물을 연결하는 들보를 비천이 받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9굴과 10굴의 明窓 천정부의 연화문과 비천. 조각이 세밀하면서도 뚜렷하고 힘찬 느낌이 든다.



제11굴의 전실 서쪽 벽면장식. 중앙의 감실에 부처가 앉아 있는 형상이다. 감실의 지붕을 보면 기와 지붕의 서까래 아래 공포가 있고, 용마루의 양쪽 끝에는 용두가 있다. 완전한 중국식 건물의 표현이다. 서역에서 건너온 불교미술 양식이 점차 중국화 되어가는 과정으로 보여진다.



대동은 선비족의 북위(北魏) 왕조가 초기 96년간(서기 398-494년) 도읍했던 평성(平城)이 있던 곳이다.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에 따르면 종교장관격인 사문통 담요가 460년 당시 문성제에게 석굴조영을 주청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 석굴에 봉안된 크고 작은 불상만 5만개가 넘는다고 하는데 실제로 가장 큰 불상은 제3굴과 제5굴 그리고 담요 5굴이라 불리는 제16에서 20굴까지의 10개가 채 못 된다.

현존하는 주요동굴은 53개, 동쪽에 4개, 중부에 9개 서부에 40개가 있다. 그 외에도 작은 동굴은 무수히 많다. 작은 것들은 대개 개인의 기도를 위한 것 같다. 도합 1100개의 감실(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일종의 닷집) 과 크고 작은 불상 51,000여개가 된다고 한다.

도문제 탁발규는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북위를 건립했다.(386년) 그는 한족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평성, 지금의 대동에 도읍을 정하고 천도(398)한다. 그리고 6대 효문제 때 다시 낙양으로 천도(494년)하기까지 약 100여 년 동안 대동은 북위의 수도였다. 운강석굴은 이 시대 중기에 파여졌다. 운강석굴은 북위왕조의 불교성지였다.

도문제 탁발규는 시내에 커다란 불교 사원을 건립하는 한편 사문 법과로 하여금 승단을 이끌게 하였다. 법과는 사문불례속(沙門不禮俗)의 전통을 깨고 황제에게 예배하였다. 황제는 곧 부처가 되었다. “當今如來”.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석굴에 조성된 부처의 모습은 역대의 황제의 모습을 본 따 조각되었다.





어느 굴인지 명확하지 않다. 역시 벽면에 조각된 부처의 조상이다. 왼손의 수인은 정확하지 않으나 오른손은 비록 비스듬하긴 하지만 항마촉지인처럼 손바닥을 펴 아래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손가락은 보살상의 머리에 닿아 있다. 이런 형식은 어느 곳에서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이다.



제13굴 서쪽 벽면 7보살 입상. 복장의 색상과 선이 화려하다.



제13굴 교각미륵보살상. 일반적으로 앉아 계신 부처상이나 보살상 등은 평평한 보좌에 가부좌로 앉아 계신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의자가 아닌 약간 높은 보료에 앉으셔서 발을 내려뜨리시면 사진에서 처럼 다리를 교차하여 약간 늘어뜨린 모습의 교각상이 된다. 한국에서는 본 적이 없는 양식이고 돈황의 어느 굴에선가 이와 비슷한 양식의 불상이 있다. 위에 사진중 제9굴 입구의 양측 하단부 기둥 뒤쪽을 보라.

운강석굴의 여러 굴들을 보면 특히 아랫부분의 훼손이 심하고, 또 제3굴의 불상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홈이 파져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이 13굴의 석상을 보면 그 홈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바위의 질이 무른 사암에 조각되어 있으므로 특히 사람과 바람에 의한 풍화가 하단부에 많이 작용하였다. 후대의 사람들은 훼손된 부분에 얇게 진흙을 발라 굳힌 다음 조각을 하고 그 위에 색칠을 하였다. 그런데 진흙이 표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한 지지물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훼손된 부분에 일정 간격으로 홈을 판다음 그 곳에 나무를 쐐기처럼 박아넣어 진흙층이 박리되지 않고 고착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그 나마도 떨어져 나가 보수한 흔적이 남은 것이다.



제13굴 동쪽 벽면 장식



어느 굴인지 명확하지 않다. 한쪽 벽면에 조그마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을 망원으로 잡았다.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보살상으로 보인다. 눈을 지긋이 감고 선정삼매에 빠져 있다. 사진을 찍는 각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왼쪽 무릎이 조금 높이 있고 왼손도 가만히 올려 놓았다기보다는, 깊고 오랜 선정 수행 중에 돌연 깨달음을 얻는 순간, 손을 무릎에 탁 내리치는 형세로 보이기도 한다. 형용하기 어려운 신비한 미소로는 그 깨달음의 즐거움을 표현하기가 부족하였는지, 1600여년전 이름 모를 석공은 양쪽 소매를 하늘로 날아갈 듯 살짝 들어 올려놓았다. 깨달음에 기쁜 보살의 마음 속내를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운강석굴은 석굴의 형식과 내용에 따라 3기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제1기는 담요가 문성제의 지원을 받아 파기 시작한 16굴에서 20굴의 속칭 담요 5굴(460~465)이다. 이 굴의 특징은 내부 공간을 원형의 돔형으로 파고 중앙에 삼세불을 모시고 그 사방벽을 수많은 작은 부처로 장식하였다. 삼세불 중 주불은 특별히 커서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문성제 이전의 다섯황제의 모습을 본 따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어느 굴이 어느 황제의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제2기는 문성제가 사망한 후, 낙양으로 천도하기 전의 효문제 시기(465~495)이다. 운강석굴의 최대의 굴인 제3굴이 조성되었다. 이 시기 석굴의 특징은 평면다방형이다. 전실과 후실로 구획이 나뉘고 일부 굴의 경우는 중앙에 기둥형의 탑주가 건축되었다. (제6굴, 13미터) 사방의 벽은 상하단 층층이 구분이 되어 수많은 정교한 불상과 부처 그리고 본생담(자타카)이나 사문유희 등 불교 관련 고사들이 세밀히 조각되었다. 형상과 소재에서 다양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중국전통의 건축형식과 장식 그리고 부처와 보살들의 복장에서도 중국적인 문양과 양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7굴 후실의 남벽상부의 6척 공양인, 제9굴, 10굴 전실 북벽상의 기악천 제9굴 제2도 명창 정부의 비천부조 등 예술 수준이 높다. 화려한 불국의 열기를 묘사하였다.

제3기는 494년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 파여진 굴이다. 낙양 천도 후 평성 즉 대동은 北都가 되었고 중요한 불교 성지로 남았다. 이 시기는 조성 중 중단되어 미완성으로 남은 굴이 많고 크기도 중소형의 굴이 많이 조성되었고, 소박하고 작은 불감형식의 굴이 많이 파여졌다. 동굴 내부 평면도 단순 직사각형의 양식이 많아졌다. 중앙에 탑이나 사면 벽에 불감을 조각한 형식의 굴이다. 굴 문의 외벽에 문양이 생겨나고 제 2기의 다양한 형식의 변화의 기세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전체적으로 운강석굴은 간다라 미술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고 부처나 보살들의 자태가 생동적이고 선이 간결하며 옷 문양의 강조, 초기 인도 불교의 요소가 많은 것 등이 큰 특징이라고 한다.





제16굴, 제16굴~제20굴(460~465)은 담요가 당시 북위의 황제인 문성제의 주청을 받아 처음 운강석굴을 조성한 가장 초기의 굴로 속칭 담요5굴로 불리운다. 문성제 이전의 다섯 황제의 모습을 본따 조성한 것이라 하는데 어느 굴이 어느 황제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북위 초기 중국 복식으로 개혁을 한 후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 불상을 언듯 처음 본 순간 어라! 웬 외국인이 한국의 한복을 입고 왜 여기 서 있나 하는 착각이 들었다.



담요 오굴의 특징은 전실과 후실의 구분이 없이 돔형 천장의 단일 구조로 되어 있다. 커다란 불상을 중간에 모시고는 좌우 벽을 온통 크고 작은 부처로 장식을 한 것이다. 소위 천불동, 만불동으로 불리우는 이유다. 사진에 보면 작은 부처도 옷 모양이나 형태가 조금씩 다 다르다.

그러나 이곳을 조각한 석공은 엄숙한 불법의 세계의 조성에 약간 지루한 느낌이 들었을까? 살짝 자신의 유머를 섞어 놓은 듯 하다. 씩 이빨을 한껏 들어내며 뒤돌아 보며 웃는, 이름 모를 동물의 모습이 정겹다. 석공은 꿈에도 몰랐으리라. 1600여년이 지난 후 멀리 동쪽에서 온 나그네가 자신이 조각해 놓은 작품들을 보면서, 자신이 조각할 때의 감정을 사색으로 헤아리며 마냥 즐거워 할 줄은.....작게 새겨 놓으면 못 보고 그냥 지나칠 줄 알았나 보다.



제18굴. 담요 오굴의 불상 중 서있는 입상을 보면 상반신이 하반신에 비해 길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 시쳇말로 하면 숏다리이다. 아마도 입상의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 보는 각도가 많으므로 일부러 그렇게 표현한 듯도 싶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이 차이는 확연히 드러나 보인다.



제19굴. 눈꼬리가 길고 코의 선이 길쭉하고 시원하게 내리 뻗었다. 확실히 요즘 한족은 아니고 중앙아시아 민족의 모습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서양에서나 동양에서나 위대한 사람은 얼굴에서나 몸에서 빛이 나는 모양이다. 불상 조각에서는 빛이 몸과 얼굴 부분에서 나오는 모습을 얼굴 뒷부분에 빗살로 표현하거나 원형으로 한 다음 그 주위를 화염 무늬로 하였다. 여기 운강에서는 화염의 안쪽에 한쪽 무릎을 꿇거나, 가부좌로 앉아 있는 부처나 보살상을 새겨 넣어 그 존귀함을 더 하였다.



제20굴. 운강석굴을 대표하는 높이 13.7m의 석가모니상이다. 결가부좌에 수인은 비록 훼손이 많이 되었지만 선정인으로 보인다. 대개 한국의 불상은 약간은 풍만한 몸집에 대개 눈을 지긋이 반쯤 감은 선정에 든 모습이 많다. 자비와 온화한 모습을 표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기 운강의 불상은 비록 선정에 있다고 하더라도 눈을 크게 뜨고 미소를 지은 모습이다. 약간은 길쭉한 얼굴 선과 특히 복장의 선이 강조되어 직선적이고 활달하며 역동적인 이미지이다. 초기 중국에 전래되어 그 교세를 확장하려는 불교 지도자들의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이미지가 반영이 되어서인가 추측해 본다.

이 굴의 전면부와 왼쪽에 있어야 할 입상은 매우 이른 시기에 무너져 내렸다한다. 윗부분에는 목조 구조물을 지탱한 듯한 사각형의 구멍이 보인다.



이날 날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태양은 하염없이 뜨거웠다.



베이징디카가족 롱칭샤원츄님 촬영.



==============================================================================



운강석굴의 입장료는 60원이다. 학생은 30원



시의 동남쪽 끝에 있는 신카이루에 간다음 버스를 갈아 타야 한다. 신카이루에서는 20원에 택시를 대절해서 갔다.



위 글의 내용 중 대부분은 아래의 책과 사이트에서 직접 인용 혹은 참고 하였다.



상해 동치대학 중화여유관광지남 1993년 판

까치글방 신중국사 존 킹 페어뱅크 중국역사연구회 번역판

네이버 지식검색 및 백과사전

인용한 글과 설명 중 오류가 있을수 있으므로 틀린 부분을 지적해 주시면 곧 수정하겠음.



사진의 내용과 글의 설명 중 기억의 착오로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음.

 

 

=========================================

 

2005년 5월 쓴 글입니다

출처 : 뻬징아자씨의 블로그
글쓴이 : 뻬징아자씨 원글보기
메모 : 가볼수 없다면 블로그에서라도 뜨기를 기다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