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신라방, 고려영, 박씨촌... 그리고 신선족

맑은 계곡 2006. 10. 27. 16:26

[700만동포 아리랑-중국편③] 중국 속 '한국'의 변천사

 

  조창완(chogaci) 기자 [오마이뉴스]  
▲ 치산 파화위안에 있는 장보고상
ⓒ 조창완
산둥반도의 가장 동쪽인 웨이하이시 청산토우에서 한국 공해까지는 94해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백령도의 닭우는 소리가 청산토우에서 들렸다 할 정도다.

이 청산토우에서 멀지 않은 롱청 스다오에는 츠산 파화위안이 있다. 해신 장보고가 세운 사찰이다. 거대한 청동불상이 음악분수에 맞추어 돌아가고 있다. 또 장보고 기념관도 다양한 사적을 갖추고 있다. 그에게 무국적인의 이미지를 씌워 중국화하려는 경향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지금 파화위안에는 당시의 흔적이 거의 없다. 한 수산물 회사가 대부분의 자금을 투자해 부활한 프로젝트 속에 있는 박제화된 역사일 뿐이다. 어쨌든 장보고 기념관 앞 전망대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가슴이 확 트인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전 이곳에 한민족의 집단 거주지인 '신라방'이 존재했다. 장보고의 해상권 장악으로 번성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제 이 곳에서 한민족의 흔적을 찾기란 어렵다.

▲ 치산 파화위안의 정문. 한 수산회사가 세운 이벤트에 가까운 곳이다
ⓒ 조창완
그렇다면 신라방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고국으로 돌아갔을까. 아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에 건너온 유민들 가운데 상당수가 고국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열악한 교통 수단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근처에서 한민족의 문화를 찾아볼 수 없다.

1200여년의 긴 세월. 우리 민족의 흔적이 사라진 이유는 무었이었을까. 이후 한국인들의 중국 진출사를 더듬어 보자.

[고대] 고려영, 박씨촌... 변화 속에 한국인

한반도와 멀지 않은 화베이 지방에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지명이 많다. 고려군이 진을 쳤다는 의미의 고려영, 고려 사람들이 머물던 둑 지형의 지명이라는 고려보 등. 실제로 1780년 연행단으로 베이징을 방문했던 연암 박지원이 당시 우리나라 유민들이 사는 곳을 만나 그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그들이 병자호란 등의 시기에 중국에 건너온 이들인데,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한 민족이라고 해서 사신단인 연암의 일행을 반기지도 않았고, 연암 일행 역시 그런 유대감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서서히 한족화되어가고 있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 항일운동의 본거지였던 왕청문에 있는 조선족 학교 복화소학은 이미 폐교됐다
ⓒ 조창완
그럼 그 흔적들은 어떻게 변모되어 가고 있을까. 랴오닝성에 위치한 박씨촌이라는 곳이 있다. 1992년 김일경 중국안강위원회당교 부교수에 의해 발표된 '중국 遼寧省의 朴氏村과 朴氏居民'는 관련 내용을 잘 설명하고 있다.

원래 중국에는 박씨(朴氏)라는 성이 없다. 박씨성은 신라시대 이후 한반도에만 발생한 성이다. 그런데 랴오닝성에는 세 곳의 박씨성 마을이 있다. 판시셴 산청자샹 피아오바오춘(朴堡村), 까이셴 천둔샹 피아오지아고우춘(朴家溝村), 료양스 타이즈허취 피아오지아고우춘(朴家溝村) 등 3곳이 바로 그곳이다.

이 곳의 지명은 박씨 성을 가진 이들이 살아간다는 뜻을 담고 있고, 각각 205명(1982조사), 277명(1982조사), 64명(1992년)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곳 주민들 사이에는 당나라 군대를 피하다가 이 지역에 마을을 형성했다는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하지만 누루하치와의 전쟁 기간에 이곳으로 건너와 정착한 노예 중 박일, 박오 등 박씨의 후손들이 정착했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이 견해를 전제하면 이들이 이 곳에 정착한 것은 380여년이 되어간다. 이 마을에는 전설 속의 동굴 등은 물론이고 절구·구리밥 그릇 등 조선시대 유물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이들 중에는 밀양 박씨의 족보도 갖기 때문에 박씨의 후예임에 틀림없다.

이들은 청나라 시대에 국적을 잃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중국 공산화 이후 조선국적을 회복한 이들이 많다. 또 최근에도 이들의 조선국적 회복 요구가 많다. 한국의 국력이 높기에 가능한 요구들이다.

[현대-해방 전] 간도로 건너간 한국인들

▲ 헤이롱지앙 발해 유적지 둥징청에 있는 현무호. 조선족이 진출해 농업기반을 세웠다
ⓒ 조창완
만주는 고구려 이후 한민족이 거주하기 쉽지 않았다. 강희 7년인 1668년, 이곳이 청나라가 발생한 신성한 지역이라고 해서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봉금령이 실시됐다. 청나라가 강성할 때는 출입조차 어려웠지만 대기근이 들었던 1869년 기사년 재해 이후 우리 민족들이 하나둘씩 만주로 생활 영역을 넓혔다.

이후 3년간 이 곳에 건너간 사람이 6만명이고 그 가운데 함경북도에서 넘어간 사람이 2만6000명으로 전한다. 이후 우리 유민과 중국인들의 마찰을 막기 위해 간도(間島)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한민족의 만주 유입은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더욱 빨라졌다. 수많은 이들이 일제의 치하에 들어간 우리 땅을 벗어나 만주 등 중국에 건너왔다. 당시에 일본은 GDP도 조선의 수십배였고, 치밀한 정보전을 통해 일거에 한반도를 장악했다.

뜻있는 이들은 초반기에 제거의 대상이 됐고, 그것을 아는 많은 이들이 중국을 해방의 근거지로 삼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곳 역시 만주사변(1931년)을 거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중일전쟁(1937년 7월) 이후에는 더욱 혼돈스러웠다.

1945년 해방은 만주에서 살아가던 많은 우리 민족에게 변화의 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짐을 꾸려 고향에 내려갔지만 그에 못지 않은 이들이 동북에 남았다. 주로 많이 남은 이들은 대기근 이후에 이곳으로 건너온 이북 출신이었다. 이들은 휴경지와 같았던 이곳에 벼농사 등 새로운 생산기반을 만들어 나름대로 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현대-해방 후] 문화대혁명 속에서도 언어 지킨 조선족

해방 후 한반도는 복잡한 정세의 연속이었고,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1949년 공산화되기까지 복잡한 형세가 지속됐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있었다. 초대 연변조선족 자치주 주장을 지낸 주덕해(朱德海)다.

주덕해는 공산화 전부터 우리 민족 예술을 부흥하는 문공단을 만드는 것을 비롯해 교육·언론·농업 등에서도 독자적인 기구를 만드는 데 최선을 다했다. 문공단은 후에 '연변가무단'이 됐고, 동북조선인민대학은 '연변대학'이 됐다.

당시 인구로 보거나 정치적 지형으로 보거나 자치구의 성립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1921년부터 1982년까지 길림성에서 희생된 3만6천명의 열사 가운데, 연변 열사가 1만4756명이고, 그 가운데서도 1만3843명이 조선족이었다. 무려 93.8%다. 조선족의 숫자가 당시에 100여만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선족 자치구의 성립은 당연한 일이었다.

▲ 초대 자치주 주장인 주더하이의 기념비
ⓒ 조창완
하지만 중국 혁명 열사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인 주덕해 주장이 문화대혁명에 후베이성으로 피신했다가 비극적으로 숨을 거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 현대사도 만신창이였다.

대약진으로 인한 기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이 포함된 문화대혁명 등은 조선족 사회에도 큰 시련이었다. 문화대혁명시기에는 총을 들고 무장투쟁을 한 유일한 소수민족이었다. 그만큼 조선족 사회는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해방 당시 100만명 가량이던 조선족 인구는 200만명 가량으로 늘었다. 동북 뿐만 아니라 연해지방은 물론이고 네이멍구, 깐수 등 서북부 지역까지 넓게 분포했다.

조선족은 언어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문화를 유지한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다. 또한 중국 정협 부주석을 지낸 조남기 장군을 비롯해, 소수민족 사업을 총괄하는 이덕수 부장, 중국 공군을 세운 인물 중에 하나인 이영래 공군 중장 등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현재] 신선족, 재중 한국인의 슬픈 자화상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이 있었다. 중국으로서는 적대감도 없고, 한단계 빨리 경제성장이 필요한 한국과 수교가 절실했다. 한국 역시 변화하는 경제질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중국으로 진출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였다.

1992년 8월24일 한중간에 국교가 정상화되었고 한국은 중국에서 빠르게 자리잡았다. 특히 중국의 안정적인 생산기반은 한국이 IMF체제를 극복하는 데에 일정부분 기여한 측면이 있다. 이 과정에서 조선족 동포는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 한민족 지성을 이어가던 옌볜 용정 용두레 우물터
ⓒ 조창완
조선족 동포가 중국내에서, 혹은 한중 관계에서 자리잡아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가 생겼다. 소위, 신선족(新鮮族). '중국에 정착하는 한국인'들이다. 92년 국교정상화 이전부터 한국 기업인들에게 중국은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어 먼저 개통된 선박편은 물론이고, 홍콩을 통한 진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중국에 정착했다.

인천과 웨이하이간에 배가 개통된 시간이 90년 9월이라고 보면 이들의 진출사는 이제 16년을 넘어섰다. 하지만 중간에 크고 작은 변곡점이 있었다.

▲ 한국인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왕징의 한 상가. 한글 간판이 중심이다
ⓒ 조창완
우선 가장 큰 기점은 92년 한중수교라고 볼 수 있다. 또다른 분기점은 97년 IMF관리체제다. IMF 체제는 중국 속에서 활동하던 한국인들에게 치명적인 좌절의 시간이자, 엑소더스 한국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변화의 시간이 됐다. 위기 전에 왔던 한국인들은 대부분 치명적인 손실로 어려움에 빠졌고, 이후에는 들어오는 이들은 작은 자본으로 새로운 출구를 찾아서 중국사업을 꿈꾸는 이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변화점은 2002년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2002년까지 중국에 오는 이들이 막연히 '차이나드림'을 꿈꿨던 사람들이었다면 이후에 오는 이들은 그간에 축적된 다양한 데이터를 중시하고, 진출하는 과정에서 언어 등을 준비하는 등 제법 체계화된 진출자들이다. 또한 향후 동아시아나 세계질서에서 한중관계가 필수라는 것을 인식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더 많은 것을 갖고 중국으로 건너왔지만, 이미 중국의 경쟁환경이 치열해 지면서 좋은 결과를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올림픽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음 변곡점은 2008년일 것이다. 베이징시 중심에서 공항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인구 45만명 가량의 신도시인 왕징 거주자 중에 1/3이상은 한국사람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유학생이 많이 거주하는 우다코우를 합치면 베이징의 한국인 인구를 가늠하기 쉽지 않다. 거기에 톈진·산둥 반도·랴오닝 반도·상하이 등 화둥지방·광둥은 물론이고 이제 한국인이 없는 중국 도시는 찾아보기 힘들다.

[미래] 언어·교육 등 난제... 정체성 유지 어려워

▲ 베이징의 코리아 타운인 왕징의 표지
ⓒ 조창완
이들 신선족에게 운명처럼 주어진 몇가지가 있다. 우선 한국에 돌아가기에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업이나 유학으로 중국에 건너온 이들은 매년 10% 성장하는 중국의 변화속에서 수없이 다양한 기회와 접한다.

하지만 진출 과정에서 자신이 가진 자본의 대부분을 소진한 이들은 어차피 중국을 토대로 새로운 사업을 구상할 수 밖에 없다. 또 중국은 한국에서의 생활에 비해 경제적으로 큰 돈이 들지 않는다. 왕징 중심가는 보통 월세가 2500위안에서 1만위안 사이지만, 약간 교외로 벗어나면 월 500위안에 생활비 500위안이면 살 수도 있다.

거의 좌절을 겪은 IMF관리체제 이전 진출자들을 버티게 해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뒤에 들어오는 이들이다. 이들은 언어나 경험 등에서 영역을 구축하기 힘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선발자들을 찾게 된다. 이런 조합은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우선 선발자라고 해서 갖는 이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규언어 과정을 밟지 않았기 때문에 언어 구사에 있어서 미숙하다. 따라서 이들 조합은 실패의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러면서 조선족 동포보다는 신선족을 조심하라는 게 중국에 진출하는 이들에게 계명처럼 되어 있다.

곧 100만명을 바라보는 신선족의 가장 큰 문제는 인프라다. 랴오닝의 박씨촌이 지금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성씨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성씨의 개념이 약했던 신라방이나 중국에도 성이 있는 한국적의 씨족 같은 경우 자연스럽게 중국화의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향후에 박씨촌 같은 것이 생겨날 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관건은 언어가 될 것이다.

이 문제에서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현재 베이징·톈진·옌타이·상하이 등지에 한국국제학교가 생겨 한국어를 중심으로 교육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이나 수용인원에서 적지 않은 한계가 있다. 지금처럼 한국의 국력이 부강해 중국인들조차 한국어를 배우는 이들이 있다면 동포나 한국인들의 언어전달은 큰 문제가 없겠지만 역사의 훗날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현재 중국에서 생활하는 한국인들 가운데 한쪽이 엄마 쪽이 중국 국적 등 외국국적인 경우 아이가 한국말을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고, 엄마가 한국국적이라도 한국어를 못하는 이들이 상당수이다. 이들이 언어를 잊고, 중국과 비슷한 성씨를 쓸 경우 수백년 후에 이들에게 한국인의 특성을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출처 : 아이저아라
글쓴이 : 아이저아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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