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크랩] 인도 드라비다어의 언어와 비슷한 한국어

맑은 계곡 2006. 9. 27. 12:29

(규슈 미야자키현 마토노신사 비석에 있는 가림토문자)(촬영:글돋선생1994년11월경)

 

한글의 원형은 고조선 가림토문자

21세기의 벽두, 우리 나라는 정보화시대의 선진국 지위를 자리 매김 했다.

이웃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정보화 속도에 있어서 우리 나라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는데 다름 아닌 한국인이 사용하는 한글의 우수성과 편리함 때문이다.

컴퓨터 자판을 보시면 왼손은 자음 오른손은 모음을 치게 되어있다.

한글은 왼손(陰), 오른손(陽)을 번갈아 가면서 아주 빠른 속도로 타이핑이 가능하며 그 어떤 문자도 이것을 따라올 수 없다.

일본의 히라까나 가타카나나 한자를 키보드로 입력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지는 누구나 공감하는 사실이다.

외국인들을 상대로 우리 한글을 가르치면 불과 40분만에 한글로 표기한다고 한다.

영어 알파벳 다 배우는데는 며칠이 걸리고 한문은 평생을 공부해도 다 알기 어렵다.

또 휴대폰을 보면 천지인 삼재를 형상한 ?ㅡ ㅣ 세 개면 모든 모음을 표기할 수 있다. 세계 어느 문자도 감히 이것을 흉내내지 못한다.

삼재(三才)와 오행(五行)의 우주원리가 담긴 한글은 서양의 알파벳보다도 월등히 우수한 세계 최고의 문자다.


단군세기 3세 단군 가륵(嘉勒)조와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을 보면,

단군 가륵 2년(BCE 2181)에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정음 38자(字)를 창제했다는 기록과 함께 글자의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이것도 참고하시라 ^^)... 조선 선조때 조여적(趙汝籍)이 지은 청학집(靑鶴集)에 그의 이름이 실려있음돠.

그런데 ‘가림토(加臨土)’ 또는 ‘가림다(加臨多)’라고 불리는 이 글자의 모습은 세종 때 창제된 한글의 형태와 매우 흡사하며,

일본의 쓰시마섬(對馬島)과 큐우슈우(九州)의 신궁(神宮)에서 자주 발견되는 아히루문자(阿比留神字, 神代文字)와도 유사한 점이 대단히 많다.

그리하여 일본의 학자들 대부분은 아히루문자(신대문자)가 조선으로 건너가서 한글의 원형이 되었다는 망언을 하기도 한다.

세종실록 25년 12월조에 “이 달에 임금께서 언문 28자를 지으시니 그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고 있다(其字倣古篆)”라고 하였고,

최만리의 상소문에도 “글자의 모습은 옛 전문을 모방했지만 음을 쓰는 것과 글자를 배합한 것은 다 옛것과 반대이다(字形 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라 하여 예전의 전서를 모방했음을 밝히고 있다.

한국의 한글학자들은 훈민정음의 창제가 독창적이었다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여,

여기에 나오는 옛 전문을 몽고 파스파 문자(蒙字)나 한자(漢子) 자체(字體)의 하나인 전서(篆書) 또는 범자(梵字, 산스크리트 문자)를 모방한 것 등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훈민정음은 몽고문자나 전서, 범자와 닮은 데가 전혀 없다.

인류문명사에서 한글처럼 고도의 체계를 가진 문자가 어느 날 갑자기 한 인물에 의해서 발명된 사례는 지구촌 어디에도 없다.

한마디로 이 나라 한글 학자들의 주장은 역사발전법칙도 무시한 터무니없는 억설일 뿐이다.

가림토 문자는 고조선시대와 열국시대 초기에 한민족이 일본열도로 이주하면서 현해탄을 건너갔다.

일본 역사의 초창기를 일본서기에서는 신대(神代)라고 부른다.

이 무렵에 일본열도로 유입된 문자이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신대문자라 부르고 있다.

가림토 문자


일본의 수많은 신사(神社)에는 신대문자가 새겨진 명문과 비석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의 귀중한 사료라 할 수 있는 고사기(古事記)는

백제인 태안만려(太安麻呂)가 완성한 것인데 원래는 위의 사진처럼 신대문자로 표기된 것이었다.

가림토 문자는 기원전 21세기경 인도로까지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송호수 교수가 인도 구자라트 지방(인도 서북부지역)에서 그 지역 사람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한글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국내에 보고한 바 있다.

여기에 많은 학자들이 주목했다.

오늘날 구자라트주에는 주로 드라비다인(Dravidian)들이 거주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까지도 우리와 흡사하다고 한다.


가림토 문자가 인도로 건너간 계기는 무엇일까?

부도지에 따르면 순임금의 부친 유호(有戶: 고수)씨가 그 무리를 이끌고 월식(月息)?성생(星生: 인도로 추정됨)의 땅으로 들어가 교화시켰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을 끈다.

단군세기에 의하면 5세 단군 구을 임금 때 신독(身毒: 인도)사람이 표류하여 동쪽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한다.

당시 인도에는 게르만계 백인인 아리안족이 아닌 인더스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은 지중해 인종(그리스인)과 유사한 혈통과 신화를 갖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프로메테우스 신화는 드라비다인의 프로메듀 신화와 동일하다고 한다.

아울러 거석문화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인도 서북부 구자라트에 사는 드라비다인은 최근의 연구결과 한국인과 공통의 유전자가 발견된다고 한다.

다른 드라비다인과 달리 언어까지 비슷해서 무려 6백 개가 넘는 단어가 같다. 그 실례를 든다면

‘엄마, 아빠, 오빠, 다리, 벼, 메뚜기(드라비다어 메디), 쌀’ 등이다.

여기서 ‘쌀과 메디, 벼’라는 단어는 고조선과 인도지역간의 농경문화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게 한다.

문제는 벼농사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느냐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기원전 3천 년경에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이 이미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도읍지

동방 고대 문자의 계보

배달

신시

신지(神誌) 혁덕(赫德)의 녹서(鹿書, 녹도문, 낭하리의 암각)
산목(算木) 사용 → 부여의 서산(書算)으로 계승
태호 복희의 용서(龍書, 육서(六書)의 원리가 제정됨 → 이른 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상고금문(上古金文), 갑골문과 한문의 먼 뿌리 한문), 최근 출간된 금문신고(金文新考)에서 상고금문을 사용한 주체가 한민족이었음이 드러남(김대성 엮음, 금문의 비밀 참고)

청구

치우천황의 화서(花書, 이른바 鬪佃目)
창힐(倉?)이 배달국 신지문자를 배워 중원에 보급

고조선

아사달

신전(神篆, 녹서를 계승한 문자, 이른 바 요녕성에서 발굴된 고조선 토기문자) 사용
가림토(加臨土)문자 → 3세 가륵 단군 때(BCE 2181년)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이 지은 원시한글.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가 됨, 훗날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으로 재현됨
은(殷)나라에서 상고금문을 계승한 갑골문자(甲骨文字)를 사용. 한자의 기원이 됨

백악산

중원지역과의 교류가 확대되고 은(殷) 왕실의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망명하면서 고조선에 갑골문자가 유통됨
주(周)나라 대전(大篆)
한수(漢水)사람 왕문(王文, BCE 9C)이 부예(符隸)를 만들고 BCE 865년 천왕에게 건의하여 삼한에 이두법을 시행함
가림토문자가 BCE 7세기경 일본의 건너감 → 일본의 신대(神代)문자

장당경

신지문자와 가림토와 한문이 병존하다가 한문(이두법 사용)으로 일원화됨

북부여

진(秦)나라의 소전(小篆)
진(秦)나라의 정막(程邈)이 부여(숙신)에 사신으로 와서 한수(漢水)에서 얻음 → 예서(隸書)

열국시대

한(漢)나라 채옹의 팔분(八分), 한예(漢隸)
후한(後漢)의 왕차중(王次中, 왕문의 후손)이 개량 → 해서(楷書)

경기도 일산과 청원군 소로리 등지에서 출토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는 야생벼가 아닌 농경의 흔적이었다.

알아둬염 ^^)..... 최근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일대는 지난 97년 11월부터 98년4월까지 5개월간 충북대, 단국대, 서울시립대 박물관이 참여하여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한바 있다.

그 결과 구석기 유적이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고 특히나 지하 1.3m 토탄층에서 20여알의 볍씨가 출토돼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볍씨는 탄소 연대측정결과 1만3천년~1만7천년전의 것으로 최근 밝혀졌다. 이는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로 기록된다.

중국 양자강 유역의 하모도(河姆渡)유적 볍씨는 7천년전이고 회하(淮河)의 볍씨는 8천5백년 정도다.

소로리 볍씨는 이보다 훨씬 이전이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5천년전의 경기도 일산 볍씨 기록을 갈아 치웠다.

이 볍씨가 재배벼인지, 야생벼인지는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이중 일부는 재배벼의 흔적이 있다.

DNA 분석결과 「고대벼」라 불리는 이 볍씨는 현재의 재배벼와 약 40%정도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만약 이 볍씨가 재배벼라면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역사는 대폭 수정해야 할 정도다.

따라서 고조선인들이 인도로 건너가 일부지역에 정착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서는 아낙네들이 빨래 방망이로 세탁을 하는 모습, 조랑말 같은 조그만한 말들도 보인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고조선의 풍속과 과하마(果下馬, pony)가 건너갔기 때문이다.

이처럼 까마득한 고조선시대부터 우리민족은 멀리 인도와도 교류하고 있었다.

충청도 제천지역의 고인돌에서는 드라비다인으로 추정되는 장두형 인종의 인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우리민족은 이처럼 오래 전부터 국제화 세계화의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인도 구자라트문자는 훗날 산스크리트 문자의 일부로 변형되었고

이것은 다시 티벳문자가 된 뒤 원나라 승려 파스파에 의해 몽골문자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조선시대 몇몇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범자(梵字)나 몽자(蒙字)라 착각한 것이다.

출처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글쓴이 : 庭光散人글돋先生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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