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 제주 추사적거지에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는 러시아 작가 니꼴라이 오스뜨로프스키의 장편 소설 제목입니다. 대학교 때 꽤 감명 깊게 읽었던 책 이지만 지금은 줄거리도 가물가물합니다.
하지만 이 책 제목만큼은 절대 잊혀지지 않습니다. 아마 책 내용보다 이 책 제목이 더 인상적이었나 봅니다. 책 제목만으로도 저 멀리서 불에 달궈져 빨갛게 달아오른 쇠를 망치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제주도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항상 여행가기전 가족들과 실랑이를 하곤 합니다. 문화유산 답사지가 많은 곳으로 가고자 하는 저와 재미있는 놀 거리가 많은 관광지를 가고자 하는 가족들과의 한판 논쟁이 벌어집니다. 이번에도 저는 안동이나 경주를 가고자 했으나 가족들은 제주도를 가고자 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정당히 타협하여 답사와 관광 둘 다 가능한 곳으로 가곤 했는데 이번에는 시작부터 제가 손을 들었습니다. 제주에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제주도 대정읍에 있는 추사적거지(추사
올 해는 추사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秋史
가히 추사 사후 또 한번 불어 닥친 완당 바람(완당: 추사의 또 다른 호)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독특한 문화와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휴양 관광지인 제주도는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육지로부터의 탄압과 극심한 빈곤, 정치범들의 유배지로서 좌절과 패배감만이 팽배했던 절망과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제주도가 절망의 유배지로서 시작은 고려를 굴복시킨 원나라 때부터였습니다. 원나라의 지배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삼별초를 마지막 제주도에서 섬멸한 원나라는 제주를 자신의 직속령으로 삼아 원나라 왕조에 위협이 될만한 인물 170명을 제주도로 유배시키면서 제주의 유배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원나라를 뒤이은 명나라도 원나라 잔여세력을 소탕한 후 그들을 제주도로 보냈으며 고려 조정에서도 간혹 죄인을 보내기도 했으나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유배지로 떠오른 것은 조선시대, 정확하게는 사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연산군 이후입니다.
유배는 성격에 따라 환도(還徒), 부처(付處), 안치(安置)로 나누는데 환도는 범죄인을 고향에서 천리 밖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것으로 격리가 목적이었고 부처는 중도부처(中途付處)의 준말로 정상을 참작하여 배소로 가던 중 도중에 한 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을 말하고 안치는 유배인의 거주를 일정한 장소에 제한 시키는 것으로 본향안치, 주군안치, 절도안치, 위리안치 등이 있습니다.
본향안치는 죄질이 가벼운 사람에게 고향에 유배시키는 것이고 주군안치는 일정한 지방에 머물게 하면서 그 안에서는 자유로이 활동 할 수 있는 것으로 다산
고조 할아버지는 영의정, 증조부는 영조의 부마, 아버지는 한성판윤을 거쳐 병조참판까지 오른 당대 세도가인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가문의 종손이고 20대의 나이에 중국의 대 석학 옹방강, 완원, 주학년 등을 만나 경학, 금석, 고증, 학예 등 전 방면에 ‘경술문장해동제일’ 이라는 평을 들었던
하지만 당시 세도가인 안동 김씨들은 그가 염원하던 청나라 문호들과의 만남을 이루기 위해 동지부사로 떠나기 직전 안동 김씨의 정치극으로 자행된 1840년 윤상도옥사를 10년이 넘어 다시 들추어낸 후 그를 억지로 끼어 넣고서 무수한 매질과 고문을 가합니다.
24세에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규장각을 거쳐 충청도 암행어사, 성균관 대사성, 공조참판, 형조참판을 역임하며 당대 최고의 글씨와 예원의 종장으로 떠받들어 졌던
그가 세도 정치의 틈바구니에 끼여 모진 고문과 매질로 초주검이 된 채 가장 혹독한 유배형인 절도위리안치 형을 받고 원악지로는 최고로 멀고 험한 제주도로 그 중에서도 서남쪽으로 80리를 더 내려온 대정읍에 온 것입니다.
추사적거지는 관광지로 유명한 산방굴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정읍 안성리에 있다.
복원된 대정 읍성 동문을 들어서자 마자 있으며 주차장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추사적거지 정문 역할은 추사기념관이 맡고 있는데 기념관에는 추사의 글씨와 그림이 전시되어 있는데 2점을 제외하면 전부 사본이며 기념관치고는 유물이 빈약하지만 문화해설사의 열정만큼은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기념관 밑에 계단을 통해 들어서면 유허비가 세워진 마당이 나오고 추사가 머물던
추사김선생적려유허비. 담장 뒤쪽이 적거지 초가의 밖거리(바깥채)이다.
초가는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안채), 사랑채인 밖거리(바깥채), 그리고 옆으로 세운 모거리(별채), 연자마(연자방아),
추사는 대가문의 금지옥엽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계속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고는 하나 타고난 천재성과 높은 인격으로 항상 주변의 선망과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왔기에 식솔 하나 거느릴 수 없는 절도위리안치라는 유배생활의 고통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제주도에 도착하자 그 동생 명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얼마나 그가 의연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시울타리를 둘러치는 일은 이 가옥터의 모양에 따라서 하였다네. 마당과 뜰 사이에서 걸어 다니고 밥 먹고 할 수 있으니 거처하는 곳은 내 분수에 지나치다 하겠네…]
왼쪽이 안채, 가운데가 별채, 오른쪽이 사랑채이다.
추사는 별채 문이 열려 있는 저 방에서 고독한 나날에도 붓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남들이 평생 동안 읽을만한 책들을 제주도 구석 좁은 방안에 앉아 주야로 섭렵하며 닮아 없어지는 붓으로 언덕을 쌓을 만큼 자신의 글씨를 다듬어 갔습니다. 아들 상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70 평생 동안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말하니 그가 얼마나 노력 파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모슬포의 칼바람속에서 동양 한자 권에서는 수천 년간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하는 강철 같은 추사체를 완성합니다.
추사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부족하고 짧은 글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지만 제가 느끼는 바는 오래된 돌에 새겨진 글씨가 비바람에 씻겨나간 후에 남겨진 글씨라는 표현에 매우 공감합니다. 옛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독특한 구성과 뜻에 맞는 글씨 표현, 무엇보다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개가 서린 있는 글씨가 바로 추사체가 아닐까 합니다.
비바람에 씻긴 듯한 글씨. 바로 그의 추사체는 제주도 대정의 칼 바람과 모슬포의 험한 바다, 거친 현무암을 닮아간 결과인 것입니다.
모거리(별채) 작은방. 이곳에 앉아 거친 비바람을 보면서 문인화의 정수[세한도]를
그렸을 것이다. 지금도 저 서합에는 제자들이 보내준 서책들이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추사가 험한 유배생활을 견딘 힘은 역시 그를 사랑하고 아낀 지인들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생활을 걱정하며 지극정성으로 뒷바라지했던 그의 부인 예안 이씨, 이재 권돈인, 초의선사를 비롯한 벗들, 3번이나 제주도를 찾아가 스승을 모신 소치 허련을 비롯한 많은 제자들, 수많은 당시 최신 서적을 끊임없이 스승에게 보내준 우선 이상적 등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인복 하나만은 타고난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타고난 인복도 한계가 있는지
[….어허! 어허! 나는 형틀이 앞에 있고 큰 고개와 큰 바다가 뒤를 따를 적에도 일찍이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는데 지금 부인의 상을 당해서는 놀라고 울렁거리고 얼이 빠지고 혼이 달아나서 아무리 마음을 붙들어 매자 해도 길이 없으니 이는 어인 까닭인지요.
어허! 어허! 무릇 사람이 다 죽어갈망정 유독 부인만은 죽어서는 안 될 처지가 아니겠소.
죽어서는 안될 처지인데도 죽었기 때문에 죽어서도 지극한 슬픔을 머금고 더 없는 원한을 품어서 장차 뿜으면 무지개가 되고 맺히면 우박이 되어 족히 남편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겠기에 형틀보다도, 큰 고개와 큰 바다보다도 더욱 더 심했던 게 아니겠소…… 지금 끝내 부인이 먼저 죽고 말았으니 먼저 죽어가는 것이 무엇이 유쾌하고 만족스러워서 나로 하여금 두 눈만 뻔히 뜨고 살게 한단 말이오. 푸른 바다와 같이, 긴 하늘과 나의 한은 다함이 없을 따름이외다]
제주도 유배생활 중 추사는 한국 문인화의 정수라 일컬어 지는 [세한도]를 그려냅니다.
추사의 회화관은 그 당시 일반적인 회화관 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추사는 청나라의 일급 화가들을 만나 엄청난 양의 일급 명화들을 직접 접하면서 당시 청나라의 최신 유행인 남종문인화를 자신의 서화정신으로 삼는데 글씨와 그림은 둘이 아니기에 그림을 그릴 때 문자향(문자의 향기)와 서권기(책에 서린 기운)이 담겨있어야 진정한 그림이라는 입장입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대부분 그림 여백에 빽빽한 발문과 제화들을 적어놓은 그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세한도는 여백이 많은 그림입니다. 옛정을 잊은 정치인들과는 달리 극진한 정성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서적을 멀리 중국으로부터 가져와 제주도에까지 전해준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보내준 편지이자 자신의 내면 풍경화입니다.
<세한도> 종이에 수묵 23.7 X 69.2 Cm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배지에서 늙어가는 자신을 늙은 소나무로 그리지만 끝에 아직 스스로 죽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듯 솔잎을 생동감 있게 그었고 그 옆으로 이상적을 상징하는 곧은 소나무를 그렸습니다. 또 바스러질듯한 갈필로 선 몇 개로 사선으로 그어 집 한 채를 그리니 그곳이 바로 절해고도의 외로운 집, 자신을 강인하게 단련해주는 추사체의 산실인 적거지 일 것입니다.
저는 [세한도]를 보면서 처음에는 그의 아스라한 처지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겠다는 고고한 정신, 그리고 제자 사랑에 감동했지만 맨 오른쪽 아래에 우선 이상적이 찍어 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장무상망(長毋相忘)’ 이라는 명문에 큰 감동 받았습니다.
2천년 전 중국 한대의 막새기와에 찍혀있던 명문인데 금석학에 조예가 깊었던 이상적이 스승에게 받은 그림에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長毋相忘 ‘ 오랫동안 잊지 말기를! ’ 이 얼마나 가슴 벅찬 글귀입니까?
[세한도]는 돌고 돌다가 나중에 경성제대 사학과 후지스까 교수가 소장하게 됩니다.
그는 청나라 학예 연구를 하던 중 박제가와 추사를 알게 되고 그 후 추사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추사연구 제 1인자 입니다. 그는 한평생 추사연구에 바쳤고 관악산 아래에 있던 추사의 초라한 묘를 찾아 예산 추사고택 옆으로 이장까지 했던 추사 매니아였습니다.
해방되기 전 후지시카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당시 청년이었던 서예가 소전
그리고 후지스카 집 옆 여관에 머물면서 매일 아침 병석으로 누워있던 후지스카를 찾아가 세한도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도 안한채 아침 문안인사 드리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문안인사를 드리는 백일째가 되는 날 노학자 후지스카는 “내가 죽기 전까지는 내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라고 말하며 세한도를 전해줍니다. 그렇게 세한도를 들고 한국에 돌아온
지난 달 국립박물관 추사 기획전 때
추사는 그 나이 예순넷이 되어야 제주 유배에서 풀려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권돈인과 연루되어 다시 철종 2년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됩니다. 그 후 2년 후에 풀려나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며 봉은사를 오가다가 71세 1856년 숨을 거둡니다.
사람에 대한 칭찬이 인색하기로 유명한 사관들 조차 <조선왕조실록>에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록했습니다.
[철종 7년 10월 10일 갑오. 전(前) 참판 김정희가 죽었다. 김정희는 이조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총명하고 기억력이 투철하여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익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해서.전서.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중략)....젊어서부터 영특한 이름을 드날렸으나 중도에 가화(家禍)를 만나 남쪽으로 귀양가고 북쪽으로 유배가며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며, 혹은 세상의 쓰임을 당하고 혹은 세상의 버림을 받으며 나아가기도 하고 또는 물러나기도 했으니 세상에선 송나라 소동파에 비교하기도 했다]
그 어떤 학자도 추사의 학문과 예술을 전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방면에 추사가 올라선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학, 시, 서, 화에 정통 했으며 전각과 금석학에 대해서도 당대 제일이었습니다. 특히 서도에 대해서는 역대 모든 서예체를 모아 그 장점을 취득하였고 그 바탕으로 추사체를 완성했습니다.
추사는 그의 성취의 대부분을 제주도에서 이루어 내었습니다. 즉 시련에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강인한 정신이 있었기에 당대 최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으며 시련뿐 아니라 그를 아끼는 무수한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쇠를 불에 달궜다가 물에 식혔다가 그리고 망치로 계속 두들기는 과정을 거쳐야만 강철로 탄생하듯이 절도위리안치라는 시련, 그 시련을 같이 하고자 했던 추사를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으려 불철주야 학문의 길로 자신을 채찍질 했던 강인한 정신을 통해 <세한도>가 그려졌고 추사체가 탄생했습니다.
제주 추사적거지는 이처럼 우리에게 시련이 무엇인지, 시련 속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찾아오는 방문객이 그런 각오를 되새기고 가는지 모슬포 칼 바람 앞에서 적거지를 지키는 돌하르방이 지켜보는 것 같습니다.
참고도서 :
<2006년 가을 간송문화 71호 추사 김정희> 최완수
<답사여행의 길잡이 11> 한려수도와 제주도
<그 섬에 유배된 사람들> 양진건 문학과지성
<완당평전 1> 유홍준 학고재
<화첩기행 1> 김병종 효형출판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조정육 아트북스
2006 . 11 . 29
금강안金剛眼